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벌휴 이사금 (문단 편집)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一年春三月 벌휴 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다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제사 지내고 사면하다 二年春二月 소문국을 정벌하다 三年春一月 주·군을 순행하다 三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三年秋七月 상서로운 벼 이삭을 바치다 四年春三月 토목 공사로 하여 농사의 시기를 뺏는 일이 없도록 하다 四年冬十月 북쪽 지방에 큰 눈이 오다 五年春二月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해 오자 구도에게 막도록 하다 六年秋七月 구도가 백제와 구양에서 싸워 이기다 七年秋八月 구도를 부곡성주로 좌천시키다 八年秋九月 치우기가 각성과 항성에 나타나다 九年春一月 국량을 아찬으로 삼고 술명을 일길찬으로 삼다 九年春三月 서울에 큰 눈이 오다 九年夏五月 물난리가 크게 나다 十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年春三月 한기부의 여자가 한 번에 4남 1녀를 낳다 十年夏六月 왜인이 먹을 것을 구하러 오다 十一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三年春二月 궁실을 중수하다 十三年春三月 가물다 十三年夏四月 왕이 죽다 특이하게 [[일식]] 기록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오고 있다. 아마 박씨 왕실에서 석씨 왕실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혼란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천문 관련 학문이나 부서 혹은 사관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기 이전 신라의 일식 기록에서, [[낙랑군]]이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에게 접수되는 시점인 4세기 초반 이전 기록들은 주로 낙랑군의 기록을 복붙한 것으로 해석되는 추세다.[* 신라의 일식 기록은 기년의 정확도가 대단히 의심되는 초기사 부분과는 달리, 하필이면 고구려가 낙랑군을 접수하는 4세기 초반까지는 어느 정도 교차검증되는 편이다. 가장 개연성있는 추측은 낙랑군 유민이 해당 기록을 갖고 신라로 들어왔거나 신라가 낙랑군과의 활발한 교류 과정에서 접수했다는 것인데, 현재로선 어디까지나 추측이 될 수밖엔 없다. 자세한 내용은 김용운 교수의 《한국수학사》 참조] 아마 일식 자체의 기록은 실제 있었던 기년과 일치할 가능성이 높지만 박-석 교체가 그렇게 무난하지만은 않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 원사료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연대를 배치할 때 해당 연대에 끼워넣었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